느티나무 그늘에 한 번만이라도 앉거나 누워보십시요. 굳이 고향 느티나무 그늘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모든 느티나무는 형제거든요. 아니 이웃사촌의 너른 가슴과 아랑을 지녀서 누구든 밀어내지 않습니다. 가진 것이라곤 서늘한 그늘 뿐이지만 그 밑에 가면 잃어버린 것들과 꿈꾸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그 아이들은 이미 느티나무 그늘을 잊어버렸는지도 모르지요. 그 청년들은 도회의 사막에서 온갖 죽음의 징후들에 휘감긴 채 시들어가면서 시간이 없어서, 너무 바빠서 그 느티나무 그늘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노인들은 인간으 양식으로 삼기 위해 가축을 기르면서 가축에게는 곡식을 먹이고 인간은 굶주려야 하는 세상을 한탄하다 모두 떠났습니다. 꽃 상여 타고, 마을 느티나무 앞에서 이별가로 불러주는 상두가도 없이, 영구차 통 속에 갇혀 화장터 기름불 속에서 뜨겁게 타 죽었습니다. 그래도 느티나무는 서 있습니다. 서서 기다립니다. 그 아이들과 그 청년들, 그리고 그들의 아이들과 또 아이들의 아이들이 돌아올 것을 기다리고 서 있습니다.....
정동주
시집<농투산이의 노래>를 발표하면서 글쓰기를 시작하여, 장시<순례자>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서사시집<논개>를 비롯해 일곱 권의 시직을 펴낸 뒤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대하소설<백정>, <단야>, <만적>, 장편소설<콰이강의 다리>, <신으 지팡이>, <불으 지문>등이 있고, 역사 자료집 <까레이스끼 또 하나의 민족사>, 평전<논개>, 오페라<조선의 사랑, 논개>, 민족극 <진양살풀이>가 있다. <신의 지팡이>, <까레이스기 또 하나의 민족사>, <논개>등은 일본에서 번역 출판 되었다. 주요 논문으로 <민속과 한국의 색체 연구>, <조선천민제도 연구- 백정을 중신으로>가 있다. 이후 <소나무>, <조선 막사발 천년의 비밀>을 출간하였고, 계속해서 한국의 문화 및 한국인의 정체성에 관한 연구와 집필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으며 그 결과물의 하나로 한국의 뿌리 시리즈 첫 번째 권인 <어머니의 전설>을 출간했다.
윤병삼 (사진)
1956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경남대학교 산업대학원을 수료했다. '화왕선의 사계' '자연이 숨쉬는 산' 등의 개인전을 열었고, 한국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대원으로 활동하면서 촬영을 담당했다. 대한민국 국민포장, 대한민국사진대전 대상, 한국 사진문화상 작품상, 경상남도 사진문화상 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저서로 <에베레스트> <자연이 숨쉬는 산> 등이 있다.
- 서문
1. 전설의 시원을 찾아서
2. 하늘마당에서 꾼 꿈
3. 느티나무와 민속
4. 느티나무 숲에서 자란 역사
5. 느티나무 그늘로 살아 있는 이름
6. 읽어버린 시간을 위하여
7. 다시 느티나무 밑에서
- 느티나무 천연기념물 목록
- 참고 문헌
고수레!
보리타작 끝나가는 뙤약볕 아래서는 벼 포기들의 푸른 군무가 넓은 들판 가득 펼쳐집니다. 마을마다 집집마다 여름철이 베푼 은총으로 모처럼 생기가 넘칩니다. 들파니이든 산골짝 어디든 푸른빛 나는 풀잎과 열매면 대개는 먹을걸리가 되는 것이어서, 어떤 거승ㄴ 삶아 무쳐 먹고, 어떤 것은 생으로 그냥 먹습니다. 그 자체로 약이 되고 밥이 되기 때문입니다.
지난 삼, 사, 오월 석 달은 해마다 되풀이 되는 한 맞힌 보릿고개여서 유월과 칠월까지 오는 데는 탈도 많고 사연도 많았습니다. 보릿고개 넘으면서 바라본 산고 들은 인간도 그저 수많은 목숨 중의 하나일 뿐임을 바람 소리, 물 소리가 말했습니다. 대지 위으 초목에게는 저마다 이름이 있습니다. 풀벌레, 나비, 새와짐승들도 다 제 이름이 있습니다. 대지으 어머니는 이름 없는 것을 낳지 않기 때문이지요. 목숨으로 태어난 모든 것은 서로 피가 닿아 있고, 꿈이 연결되어 있는 형제입니다.
어머니가 낳은 어떤 자식이나 당신에겐 똑같이 소중합니다. 인간은 인간과 드른 모습을 한 형제들의 살과 피로 살아갑니다. 다른 생명을 먹이로 삼는 인간이라 하여 풀이나 곤충을 함부로 죽여도 괜찮다는 무슨 특권 같은 것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단지 살아가는 방법이 저마다 다르고, 대지 위에서 하는 역할이 다를뿐입니다. 고사리는 꺾이고 잘려서 신에게 바치는 인간의 제사상에 올려지는 것으로 제 가치를 지니고, 보리나 벼는 몸에 지닌 귀한 기운으로 인간과 동물들을 살게 하는 것으로서 귀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일찍이 이런 대자연으 이치를 깨달은 사람들은 뭇 생명들과 더불어 사는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느티나무를 통하여 대자연으 능력을 깨닫고, 인간 자신의 뜻을 하늘에 전하는 신서의 통로이자 매개체로서 의 미를 느티나무에게 부여해 왔습니다.
<< 고향의 느티나무는 지금쯤… >> [동아일보 / 이정옥(대구가톨릭대사회학교수)]
500년 이상 된 느티나무와 대화를 나눈다면? 이 책은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 나무 근처에서 맴돌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말을 통해 가닥을 잡은 느티나무의 역사를 뒤져낸 책이다. 머리와 발 가슴을 총동원한 글쓰기로 저자는 한국인의 마음자리를 비춰내고 있다.
시인의 상상력과 사료고증, 인류학적 현지조사라는 방법론이 총동원되어 느티나무가 있는 풍경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풍경은 단순히, 사생의 대상으로서의 풍경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 자리를 파고 들어와 때로는 회한이 되기도 하고 안식이 되기도 한다. 구술, 문헌 연구, 거시와 미시, 생활사와 심성사의 복원이라는 현대 인문학의 여러 논쟁을 저자는 가볍게 뛰어넘고 있다.
댐공사, 공장 부지 편입이라는 근대주의의 홍수 속에 500년 이상 된 느티나무들은 잘려 나간다. 어떤 느티나무는 아이들의 철없는 불장난으로 없어질 뻔한 것을 마을 사람들이 나서 구사 일생을 시킨 사례도 있다. 까맣게 그을린 느티나무의 소생을 기원하는 가운데 마을 사람들의 마음은 한 곳으로 몰린다. 기원에 화답이라도 하듯 그을린 느티나무 사이로 새순이 돋고 마을 사람들은 안도와 기쁨, 느티나무의 저력을 동시에 느낀다.
500년 이상 된 느티나무는 우리의 역사적 상상력을 발동시킨다. 왜란도 있고 호란도 있다. 왜군과 호군의 추격을 피해 숨은 마을 아낙네의 이야기, 아낙네를 숨겨주는 마을 청년들의 이야기, 집안의 길흉사, 간절한 소원을 비는 마을 사람들 이야기, 그 속에 숨은 갈등과 화합의 이야기를 느티나무는 알고 있다.
이 책은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이기도 하다. 나는 가까운 일본을 여행하면서 500년 이상 된 나무는 문화재로 특별 보호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인도에서도 오래된 나무를 베어내는 벌목회사의 전기 톱 앞에서 여인네들이 나무를 끌어안고 ‘사람부터 베라’고 외쳐 나무를 구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있다.
이 책 『느티나무가 있는 풍경』을 통해 필자는 느티나무가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나무였으며 수 백년 된 나무들이 많은 수난을 겪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됐다. 특히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한 마을이 자취 없이 사라진다는 대목에서 마을이 없어지는 것은 정신의 고향이 없어진다는 것이고 마음의 황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의 빈자리를 만들어 낸다는 것을 알게됐다.
그나마, 이 책을 통해 앞으로 더 없어질지도 모를 느티나무의 자태와 한국 마을의 생활사가 글과 사진으로 복원된 것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다. 사진 미학으로 재현해 낸 느티나무를 곁에 둔 저자의 글은 마치 느티나무 아래에서 듣는 나직하지만 또렷한 이야기와 같다. 글과 사진, 시와 산문, 글과 말의 경계를 넘는 이 조용하면서도 무게 있는 실험서를 대하는 기쁨은 크다. 우리 속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현재와 과거를 이어 우리의 삶에 온기를 되찾아 준 저자에게 감사 드리고 싶다. 저자에게 말머리를 풀어 느티나무의 역사와 삶의 역사를 구술해 주었던 노인들마저 이제 떠나 버린다면?
<< 숱한 전설 잉태한 '마을의 어머니' >> [문화일보 / 전영선기자]
예로부터 한국 마을 어귀를 지키고 있던 느티나무는 나무이기 전에 한국인의 삶을 상징하는 영물에 가깝다는 것이 ‘느티나무가 있는 풍경’을 관통하는 정서다.
‘어머니의 전설’ ‘소나무’ 등으로 한국의 정체성을 탐구해온 소설가 정동주씨는 이번에는 마을마다 묵묵히 서 있는 느티나무를 소개한다.
“소나무가 올곧은 정신의 표상이라면 느티나무는 복잡한 예언을 잉태한 여인이다.” 저자는 느티나무에서 자애로운 ‘어머니’를 본다. 집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마을 중앙이나 어귀에서 오가는 이를 맞아주는 느티나무, 한여름의 따가운 햇살과 느닷없는 빗줄기를 피할 수 있게 해주는 느티나무는 어머니의 얼굴을 하고 있다.
느티나무가 한국인의 마을을 지키게 된 역사는 유구하다. 느티나무를 신성이 깃든 신의 대리자로 여긴 조상들은 느티나무 아래 모여 제를 지냈다. 느티나무는 신화와 전설을 잉태하고 있는 장소이자 산사람들이 마을의 대소사를 논의하고 챙기는 공공장소였다고 한다.
책은 느티나무의 시원, 느티나무에 얽힌 민속과 역사,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저자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수집한 각종 느티나무 이야기가 특히 흥미롭다. 충남 홍성군청 뜰에 서있는 643년 된 느티나무 두그루는 그 긴 세월 관리들이 백성을 제대로 보살펴주었는지를 살피는 역사의 증인이 돼 주었다. 고을에 액운이 감돌려고 하면 울음소리를 내는데 재앙이 닥치기 전에 울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대비하게 하는 영검함이 있다고 한다.
경남 창원 목동 사람들의 느티나무 사연도 각별하다. 목동에 살던 사람들이 해마다 음력 정월 보름이 가기 전에, 지금은 LG전자 소유지 안에 있는 옛 고향 느티나무를 찾아가 동제를 올린다. 임진왜란 이후 외지 사람들이 이사와서 만든 마을인 목동은 70년대 들어 창원 일대가 산업공단으로 지정되며 엄청난 변화를 겪는다. 목동을 포함한 수백만평의 들판이 산업기지로 개발되면서 강제 매입됐다.
고향을 헐값에 빼앗기고 타향으로 떠나야 했던 이들은 400여년 동안 동제를 모셔온 느티나무를 보전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당시 럭키 금성은 제의를 수락했고 목동 주민들은 1년에 1번씩 느티나무 아래 모여서 제를 올리며 위안의 시간을 갖는다.
느티나무는 그들에게 있어 망향의 허전함을 달래주는 존재이자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중요한 매개체다.
왕이나 정승 판서보다 고마운, 사람보다 믿음이 간다는 느티나무. 민초들의 고단한 삶을 기대도록 어깨를 내주는 존재로 한국인과 함께해온 나무 이야기가 책갈피마다 넉넉해 아스팔트 키드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저자와 함께 취재하며 독특한 느티나무와 그 주변의 사람들을 포착한 윤병삼씨의 사진도 눈여겨 볼만하다.
<< 영혼의 샘터, 저 그늘 궁전 >> [경향신문 / 김택근기자]
“지금 농촌은 절멸의 위기에 내몰려 있고, 그렇게 내몬 것은 농촌이 젖 물려 키운 도시와 그 문명입니다. 불륜과 패륜의 극치지요. 붕괴되고 있는 농촌의 광경은 곧 언젠가 겪게 될 도시의 최후 모습을 미리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느 시대의 문화, 어느 곳에서의 문명이든 인간의 마음으로 짓고 허물어지는 것인 이상 인간의 본래 모습을 상실하면서 추구하고 소유한 것으로 인간이 영원할 수는 없겠지요. 아무튼 그 농촌에는 아직도 느티나무가 서 있습니다. 느티나무는 그 그늘 아래서 뛰놀던 아이들, 삶을 의논하던 청년들,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것은 땅에 발붙이고 사는 인간이라 말하던 노인들, 그 모든 이들의 착한 마음 하나면 세상은 넉넉하시다던 옛, 옛, 옛사람들의 비망을 챙기면서 서 있습니다”(249~250쪽)
느티나무, 말만 들어도 고향 풍경이 떠오른다. 우리네 농촌마을 한가운데나 어귀에는 어김없이 느티나무가 있었다. 느티나무 나이가 많을수록 오래된 마을이었다. 누구에게나 그늘을 늘어뜨려 심신을 풀어주는 쉼터요, 마을사람들의 의견을 모으던 회의장이요, 당산제를 지내던 신성이 깃든 곳이요, 아이들을 모아놓고 글자를 깨우치던 야외 교실이요, 패륜아를 벌주기 위해 마을재판이 열렸던 간이법정이었다. 느티나무는 마을의 숨소리, 아이 울음소리, 부부싸움 소리, 송아지 울음소리, 상여나가는 소리, 간절한 기도소리, 불효자 울음소리, 손자를 얻은 노인의 너털웃음소리 등을 들으며 자랐다. 마을 주민들의 태어남과 떠남을 지켜 봤다. 정녕 우람한 자태를 지녔지만 사람을 주눅들게 하지 않는다. 바라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요란하지 않고 푸근한 것이 농부의 모습을 닮았다. 어떤 것도 가리지 않고 모두 품어준다. 500~600년은 족히 살고 어떤 나무는 천년 넘게 세상을 굽어보지만 결코 거만하거나 게으르지 않다. 언제나 처음처럼 겸손하다.
지은이는 느티나무의 생각까지 짚어냈다. 느티나무에 얽힌 전설, 그속에 깃든 민속·역사 등을 끄집어 내 정성스레 다시 펼쳐놓았다. 그리고 우리와 가장 가까운 느티나무가 점차 사라지는 현실을 아파한다.
이 땅에는 천년을 산 느티나무가 있다면 고려의 햇빛을 받고 태어나 조선의 바람을 맞고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마을을 떠나 도시로 간다. 마을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느티나무가 존재한 이래 처음으로 인간에게 버림을 받는 신세가 됐다. 느티나무는 인간을 떠나 서 있으면 외로워 보인다. 느티나무 스스로가 외로움을 탄다.
지은이는 느티나무가 우리네 삶의 무늬요 한국 농업사의 화석이자 신농씨의 지문이라고 말한다. 그 속에 전설과 신화를 품고 있다. 충남 홍성군청 뜰에 있는 두그루 느티나무는 전쟁이 터지거나 괴질이 번지는 등 고을에 액운이 감돌면 울음소리를 낸다고 한다. 전북 남원 보절 느티나무는 풍·흉을 알려준다고 한다. 봄에 일제히 싹이 트면 풍년이 들고 여러차례 나뉘어 피면 농사 짓는데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부안 내소사 경내에 있는 천년 넘은 느티나무는 6·25 전쟁때 총을 맞자 붉은 피를 흘렸다고 한다. 김제 봉남면에 있는 느티나무는 그 앞에서 정성껏 빌면 자식을 점지해 준다고 한다.
이렇듯 느티나무 그늘은 이미 우리 마음 속에까지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느티나무가 떠나고 있다. 느티나무 아래서 펼쳐졌던 공동체의 삶이 스러지고 있다. 지은이는 그래도 고향에 가면 아직 느티나무가 빈 마을을 지켜주며 떠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그래도 느티나무는 서 있습니다. 서서 기다립니다. 그 아이들과 그 청년들, 그리고 그들의 아이들과 또 아이들의 아이들이 돌아올 것을 기다리고 서 있습니다”. 느티나무가 그 무성한 잎들을 흔들며 떠나간 사람들을 품에 안고 너털웃음을 터뜨릴 그날이 올까. 고향은 자꾸 야위어 가는데 떠난 사람들은 살이 올랐을까. 올 추석에는 고향 느티나무 아래서 그 옛날 벗들과 막걸리 한잔 나눔이 어떨까.
책 속에 실린 사진들은 왜 그렇게 처연하게 아름다운지…. 아직도 기다림이 남은 이들은 느티나무에 기대어 지나온 길을 쳐다보라. 당신의 옛날이 푸른 옷을 입고 달려오리니.
<< 느티나무 추억속에 몸펴고 쭉~누워볼까요? >> [한겨레신문 / 허미경기자]
사람들이 깃든 집과 집이 모여 마을을 이뤘다. 그 마을에는 “어김없이 느티나무가 있었”다. ‘민족대이동’의 인파에 묻어 고향 길에 나서는 사람들.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 어김없이 한두 그루의 ‘마을 나무’(꼭 느티나무가 아니더라도)가 푸근히 반겨줄 것이다.
<느티나무가 있는 풍경>은 몇백년을 살아온 숱한 ‘느티나무’들의 갖가지 사연들을 통해서 한국의 고향마을과 그 사라져가는 정취들을 오늘로 퍼올린다. 느티나무는 마을마다 느태나무, 느트나무, 괴나무로도 불렸다. 그 넓은 그늘 아래 사람들을 쉬게 했던 정자나무이자 마을공동체의 안녕을 보증하는 당산나무이기도 했다.
“신렁수! 깨비당캐! 참께사리! 껑! 참껑!/신렁수!/어이!/달도 밝고 인심도 좋으니 오늘 밤 저 달이 질 때까지 신명나게 놀아보면 어떻겠는가!” 술래잡기를 하다 시들해진 아이들은 ‘마을의 수호신’ 느티나무 밑에서 ‘신렁수 놀이’를 했다. 느티나무 아래는 꼭 ‘들돌’이 놓여 있었는데, 소년들은 들돌을 들어 어깨 넘어로 던지는 ‘들돌 들기’를 통해서 장정으로 거듭났다. 장정임을 인정받은 아이의 아버지는 느티나무 아래 모인 두레꾼들에게 술 한독을 내었다.
나무 아래에선 마을회의가 열렸다. 전북 남원의 보절 느티나무는 그 그늘에 400명이 함께 쉬어도 넉넉하다 한다. 느티나무 아래엔 모기가 살지 않아 아기를 재워도 안심이었다.
1970년대 “들불처럼 농촌마을을 휩쓴” 새마을운동은 한국인들의 삶을 지탱해주던 ‘전통’들을 ‘미신’이라는 이름으로 내몰았다. 느티나무’와 마을제(동제)도 그 들불 속에 베어지고 폐기처분되었다. 책 속에서 우람하고 낙낙한 자태를 드러낸 느티나무들 가운데 더러는 ‘철제 울타리’에 둘러싸인 채 ‘보호받는 존재’로 남아 있었으니, 이들은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일말의 회한을 던져준다.
오래도록 ‘한국인의 뿌리와 정체성’을 되새김질해온 글쓴이의 말마따나 “그래도 느티나무는 선 채로 아이들을, 그 아이들의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올 한가위에는 “느티나무 그늘에 한번만이라도 앉거나 누워 볼” 일이다. 굳이 고향의 느티나무가 아니더라도.
<< 느티나무는 한국인의 고향이며 어머니 >> [한국일보 / 이종도기자]
느티나무 예찬서이자, 느티나무를 통해 한국의 뿌리로 다가가는 대중 역사서. ‘백정’ ‘논개’ 등을 쓴 소설가이자 시인인 정동주는 ‘느티나무 있는 마을 풍경은 한국의 평화로운 얼굴’이라고 말한다.
저자가 꼽는 느티나무의 미덕은 헤아리기 어렵다. 느티나무는 사람들에게 그늘을 나눠주어 쉬게 하는 정자나무이자 믿음을 나눠주는 당산나무(堂山木)이다. 느티나무 밑은 학교 노릇을 했고, 걱정을 지닌 이들이 모여 소원을 빌었던 곳이며, 마을의 대동회의가 벌어졌던 장소다.
느티나무는 100근이 넘는 무거운 돌을 어깨 너머로 던지는 성인식 ‘들돌 들기’가 벌어지는 의례의 장소인가 하면, 동네 축제이자 의식인 동제가 차려지는 곳이었다. 또한 재판정 노릇을 해 멍석말이의 벌이 내려지는 곳이기도 했다.
이런 미덕은 느티나무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진다. 고을에 액운이 감돌 때면 울음소리를 내는 충남 홍성 군청 뜰에 있는 643년 묵은 느티나무.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홍성을 찾게 되면 여기 느티나무에 절을 하고 돌아간다.
1997년 5월, 경북 청도군 매전면 동산 3리에 500살 된 마을 당산 느티나무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마을 사람들은 보험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냈고, 법원은 2,000만 원을 마을 사람에게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경남 창원 목동 사람들은 산업 개발에 떠밀려 고향을 잃은 뒤에도 사백여 년 동안 동제를 모신 느티나무 아래서 정월 초순이면 모여서 동제를 올린다. 느티나무가 "한국인의 정서를 만든 무형의 가치 세계"이자, 고향이며 어머니 같은 존재임을 말해주는 사례들이다.
산업화를 저해하는 원흉으로, 동제가 미신이라는 이유 등으로 전국의 느티나무는 근대화 이후 호된 시련을 맞았다. 저자는 잊혀가는 '한국의 평화로운 얼굴'을 더듬어가기 위해 느티나무에 얽힌 숱한 민속적, 역사적 자료들을 동원한다.
당산 제사 때 돼지를 통째로 바치는 충남 예천 지방의 느티나무 동제 이야기, 불에 탔다가 수술을 받고 가까스로 소생한 경남 남해군 삼동면 은점의 느티나무 이야기 등등에 방방곡곡의 느티나무 사진 100여 컷을 곁들여 읽다 보면 어느새 고향의 동네 어귀 느티나무가 보일 것만 같다.
<< 느티나무 그늘 밑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이야기 >>
이룸의 테마 기획 '한국의 뿌리' 시리즈 두 번째 권으로 정동주 시인의《느티나무가 있는 풍경》이 출간되었다. 이 시리즈의 앞선 작품《어머니의 전설》에서 한국 어머니의 일상을 뭉클한 감동으로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은 저자는 이번 작품에서 시인의 섬세한 감수성으로 느티나무 그늘 밑의 사라져가는 한국인의 풍경을 아름다운 한 폭의 수채화로 형상화하고 있다.
《느티나무가 있는 풍경》은 마을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건 볼 수 있었던 한 그루 느티나무를 통해, 느티나무에 얽힌 사연, 느티나무가 마을에서 갖는 상징성, 느티나무 아래에서 행해졌던 마을 공동 의식 등 느티나무를 둘러싼 갖가지 이야기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면서 무궁무진하게 펼쳐진다. 더불어 천 년을 예사로 사는 느티나무와 함께 세상의 희로애락을 겪어왔던 우리 조상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가 그대로 묻어 있다. 사진작가가 찍은 각 지방의 느티나무 100여 컷과 설명을 곁들여 읽는 맛이 한층 생생하게 전해진다.
<< 순박한 농투성이의 농심을 먹고 자라는 느티나무 >>
농촌 사회에서 느티나무는 마을 사람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몸이었다. 느티나무는 사람들이 가족의 건강과 장수를 비는 신성한 나무였고, 시원한 느티나무 그늘은 농부들의 지친 몸과 마음을 쉬게 해주었으며, 느티나무 잎이 돋는 모양새를 보고 사람들은 그해 농사의 풍흉을 점쳤다. 또한 느티나무 그늘은 부모를 농사일에 뺏긴 아이들이 마을 어르신 밑에서 천자문을 배우고 한글을 떼는 서당이 되어주었으며, 마을의 대소사를 논의하는 지금과 같은 의사당이자 민주광장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오랫동안 느티나무와 함께 살았던 사람들은 느티나무를 베거나 가지를 꺾는 사람들은 술 한 동이를 내야 한다는 규칙까지 만들어 느티나무를 보호했다. 한없이 너른 어머니의 품을 연상시키는 느티나무는 때로는 왜병을 피해 도망쳐온 처녀의 몸을 숨겨주었으며, 때로는 잠잘 곳 없는 거지나 부랑자에게 바람을 막아주는 따뜻한 침소가 되어주었다.
하늘의 신이 항상 인간과 마을을 보살펴주고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해준 나무를 당산나무라 하는데, 느티나무는 '느티 당산' 즉 '신수(神樹)'라 불린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나무이다. 동네 어귀에 서 있는 몇 아름드리 느티나무에 제를 모시고 음식을 골고루 나눠 먹는 일은 농촌의 빼놓을 수 없는 큰 행사였다. 또한 당산나무나 서낭당을 지나칠 때는 부릅뜬 장승의 눈망울이나 솟대 끝의 기러기가 왈칵 무섬증으로 다가오던 것도 당산나무가 갖는 이러한 신성성을 잘 말해주는 것이다. 이렇듯 사람들 일에 간섭하고 자리를 내주고 농사일을 거드는 느티나무는 아무렇게나 다루어도 되는 보통의 나무가 아니라 마을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고 무엇보다도 그 마을을 상징하는 신성한 힘을 가진 나무로 자리 잡았다.
<< 마을의 자치 기구이자 의회 건물로서의 느티나무 >>
이 책에는 우리 민족의 의식을 엿볼 수 있는 느티나무 아래에서 벌어졌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가 소개돼 있다.
60㎏이 나가는 들돌을 어깨 너머로 들어 던지면 성년임을 인정받게 되는 '들돌 들기'(본문 <느티나무와 민속> 69쪽 사진 참조)라는 놀이가 있었는데, 이 의식을 통과한 청년들은 성인으로 인정받아 어른과 동등한 품을 팔 수 있게 되었다. 느티나무 밑에서 이뤄졌던 동제 의식 때는 음식이 쉬 상하지 않는 물기가 없는 음식만을 장만하는데, 이것은 음식을 먹기 위해 이날 마을을 찾아오는 거지나 배곯는 자를 위한 마을 사람들의 뜻 깊은 배려이다.
마을 주민 전체가 함께 행동해야 하는 부역, 혼례와 상례 때의 상호 부조, 효행한 사람의 표창, 불효자나 마을에 과오를 저지른 자에 대한 징벌 등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의논을 나누고 다수결에 따라 결정을 짓는 대동회의도 이 느티나무 아래에서 행해졌다. 이때 느티나무는 마을의 자치 기구이자 마을의회의 역할을 했다. 서구 사회에서 발달한 의회 민주주의가 도입되기 훨씬 전부터 우리나라 농촌은 완전한 형태의 기능을 지닌 의회 민주주의를 창안하여 실천해온 셈이다. 이때의 의회 건물이 곧 마을의 느티나무 당산이었음은 제정일치의 유구한 증거가 되기도 한다.
<< 인간의 역사와 함께 쓰여진 부침의 느티나무 역사 >>
사람이 사는 마을에는 어김없이 느티나무가 있다. 느티나무가 있는 곳에 마을을 만든 것이 아니라 마을을 위하여 느티나무를 심었던 것이다. 인간의 욕망이 산과 강물, 들판과 바다, 땅속과 하늘을 자르고 죽여서 만든 이익과 편리에 의해 자연이 제물로 바쳐지기 전에는 마을마다 느티나무 없는 마을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산업사회가 시작되고부터 느티나무는 거치적거리는 존재로 전락해 베어지고, 더 이상 심지 않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일제시대에는 마을 사람들이 이 느티나무 밑에서 단결하고 힘을 모으는 것을 못하게 하는 동시에 마을의 상징인 이 느티나무를 베어 없애버리기까지 했다. 한국인의 마음을 적시고 살찌우던 원천이 고갈되면 영혼은 황무지처럼 메마르게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렇듯 느티나무는 우리 역사 속에서 우리의 뿌리 깊은 민족적 자존심으로 살아 있으면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담당하는 나무로 자리 잡고 있다.
<< 느티나무 잎에서 피어나는 잃어버린 시간 >>
마을 사람들이 느티나무에 부여한 지극한 정성을 확인할 수 있는 짧은 에피소드도 이 책에 소개돼 있다. 지금의 LG 그룹이 수원으로 이주하게 되었을 때 이곳에 공장을 짓게 되자 사람들은 강제로 타지로 떠나야 했는데, 그때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뿌리나 다름없는 느티나무를 베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마을 사람들이 느티나무에 부여한 애틋한 마음을 전해 받은 LG 그룹은 그 같은 약속을 지켜 공장을 짓는 동안 뿌리를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서 느티나무 한 그루를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었다. 지금도 뿔뿔이 흩어져 살던 사람들은 정월 초에 이곳에 모여 동제를 지내고 1년 동안 떠나 있었던 고향에 와서 잠깐이나마 향수에 젖는다. 지금의 LG는 느티나무를 그룹의 상징물로 삼고 있으며, 그룹 홍보지 이름도 <느티나무>이다.
기업의 상징이 된 느티나무는 추상화된 나무 우상으로서가 아니라 한국 역사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느티나무의 친근함, 넓게 그늘을 드리워주는 고마움, 많은 것을 쓸어안고 위해 주는 넉넉함, 사시사철 변화된 모습으로 늘 새로움을 깨닫게 하는 창조적 이미지 등이 복합적으로 아우러진 매우 성공적인 상징물로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