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기 다른 시대를 배경으로 한 단편 소설을 담은 책으로 <요람기>는 일제 시대, <남이와 엿장수>는 1940년대, <누바별>은 6.25전쟁, <후조>는 6.25 전쟁 직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들 작품은 모두가 정과 그리움을 듬뿍 담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글 ㅣ 오영수 1914년 2월 경남 울주에서 태어난 그는 주로 서민들의 소박한 삶을 그린 단편소설을 썼다. 1954년 조연현과 <현대문학>을 창간한 뒤 창작에 몰두했다. 1970년 한국문인협회 소설분과위원장을 역임했으며, 1979년 간염으로 작고했다. 소설집으로 <머루>, <갯마을>, <메아리>, <황혼>, <오영수 전집>등이 있다.
그림 ㅣ 김용선 경기도 동두천시에서 태어남.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고 그 동안 광고와 관련된 일을 하다가, 지금은 어린이 책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왕이 된 소금장수 을불이>, <옆집 팔순이 누나>, <난 너보다 커, 그런데...> 등의 그림을 그렸다.
남이와 엿장수
요람기
누나별
후조
작품 해설
큰댁 머슴에, 전라도가 고향이라는 이대롱이 있었다. 이대롱은 더벅머리 총각으로 퉁소를 잘 불었다. 더구나 억새밭인 동산 뫼에 달이 밝은 밤이면 이대롱은, 어린 과부가 나이 많은 딸을 찾아 금강산으로 간다는 곡조를 청승맞도록 구슬프게 불었다. 미나리꽝 둑에 사는 곱단이 무당네 딸 득이는 어느 해 봄, 배꽃이 눈보라처럼 지는 날 밤 이대롱과 함께 고장을 달아나 버렸다. 옷 다듬는 방망이 소리가 요란하고 지붕에 서리가 하얗게 내리는 밤, 소년은 바느질에 여념이 없는 누나 옆에 이대롱과 득이를 생각했다. 이대롱은 마음씨가 좋았다. 일쑤 까치집을 뒤져 까지 새끼도 내려주고, 박달나무로 팽이도 만들어 주었다. 얼음판에서는 지게 위에 올려 앉히고 밀어 주기도 했다. 득이는 더 마음씨 좋고 인물도 고왔다. 언젠가 득이네 집 뒤 울타리에서 찔레 순을 꺾다가 가시에 찔려 운 적이 있었다. -p. 71-
<< 돌아갈 수 없어 더 그리운…‘그때’가 좋았지 >> [경향신문 / 이무경기자]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뜻인 ‘유토피아(Utopia)’가 공간이 아니라 시간의 어디엔가에 존재한다면, 이 책에 묘사한 바로 그 어린시절, 즉 요람기(搖藍期)일 듯싶다. 객관적으로 어린시절이 괴롭고 힘든 시기였다고 하더라도, 어디서나 놀잇거리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는 아이들의 심성이나 정신세계는 대동소이하게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중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던 표제작인 ‘요람기’를 포함한 네편의 단편은 일제시대와 6·25전쟁 전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비록 먹을 것이 넉넉지 않고 컴퓨터는커녕 영화가 뭔지도 모를 뿐 아니라, 심지어 가족과도 떨어지는 아픔을 겪은 시절이기는 하다. 그러나 인물들의 마음속까지 속속들이 엮어낸 저자의 빼어난 글솜씨는 아련한 ‘시간의 향수’를 일으키며 마음이 어렸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게 만드는 것이다.
‘요람기’는 반세기 전 어느 산골마을을 배경 삼는다. 아마도 일제시대 말쯤일 듯하다. 그래도 아이들에게는 놀 일이 지천으로 널렸다. 윤초시네 머슴 춘돌이는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어른 친구다. 콩서리 해온 콩을 구워먹으면서 아이들에게는 씹지 못하게 “범버꾸” 하라고 하면서, 자신은 “냠냠” 하고 다 먹어버리고 물새를 구워먹을 때도 아이들을 따돌리고 혼자서 독차지한다. 그래도 아이들은 마냥 재미있어 한다. 아이들은 여름엔 참외 원두막 주인 ‘돌래 영감’을 약올리며 멱을 감고, 마당 감나무 밑 평상에서 수틀에 송학을 수놓는 누나와 그 동무들의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에 가을 밤을 보내고, 찬바람부는 겨울에는 여러모양 연을 날리면서 언덕을 뛰어다닌다.
‘남이와 엿장수’에서는 영이와 윤이 남매가 식모 남이를 좋아한 엿장수 총각의 아릿한 사랑을 지켜보는 줄거리다. 남매가 엿장수에게 남이의 옥색고무신을 주고 엿바꿔 먹고, 남이는 이를 되찾아 오려고 한다. 이미 고무신을 팔아버린 엿장수 총각은 남이 모르게 새 고무신을 사다준다. 그러나 그 고무신을 신고 남이는 시집 가려고 남매의 집을 떠나고, 남이에게 마음을 이야기할 겨를 없던 엿장수 총각은 그 모양을 넋 잃고 바라보기만 한다. ‘누나별’과 ‘후조’는 전쟁 때문에 피란을 가고, 구두를 닦으며 살아야 했던 소년들의 이야기다. 현실에서는 힘들게 살아가는 아이들이지만 별똥별을 보면서 고향에 두고온 누나를 생각하고, 은혜를 입은 선생님의 구두를 닦아드리려 매일 저녁 골목길을 서성인다.
아직 반세기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너무도 먼 옛날처럼 느껴지는 정서와 말투, 그리고 느낌들은 마치 처음 만났어도 피가 당기는 이산가족처럼 낯설면서도 눈물나도록 정겹다. 좋은 글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먼저 아는 것 같다. 초등학교 고학년.
<< 순이누나 별은 어디쯤 떴지? >> [세계일보 / 김은진기자]
퇴근길 비좁은 상가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할 때 한번쯤 소설 '소나기'를 떠올린 기억이 있을 것이다. 교과서적인 순수가 그리운 시절이다. 우리의 문학적 감수성에는 제도교육의 폐해 못지않게 수혜를 인정케 하는 부분들이 있다.
애창가요 못지않게 마음을 달래주는 애독소설의 힘을 느껴보기에 교과서보다 더 좋은 수업은 없다. 그러나 영상시대에 검은 건 글씨, 하얀 건 종이에 다름아닌 교과서 편제를 고수하기엔 역부족이다. 한국소설의 정갈한 언어를 보존하면서 영상을 동시에 재현해주는 책이 새롭게 만나는 우리 명작 한빛문고 시리즈(다림)다. 그 중 최근 출간된 오영수(1914∼1979) 단편집 '요람기'에는 오씨의 대표 단편 4편과 화가 김용선의 그림이 실렸다. 나무(집성목)에 아크릴로 그린 부드러운 수채화풍의 그림은 이 책을 한 편의 영상시로 바꿔 놓는다. 아동용 도서지만 어른들의 향수를 자극하기에도 좋은 책이다.
"니거는 그렇게 범버꾸 범버꾸 하고 묵어라. 난, 냠냠 하고 묵을게."
아이들은 콩을 두어 알씩 입 속에 까 넣고는 하라는 대로, '범버꾸 범버꾸." "꼬챙이로 땅도 뚜디리야지." 이래서 아이들은 또 꼬챙이로 땅을 치면서 범버꾸 범버꾸 하는 동안 춘돌이는 냠냠 하고 냉큼냉큼 잘도 주워 먹었다. 꼬챙이로 땅을 치다 보니 언제 콩을 주울 새도 없었고, 입 속에 두어 알씩 까넣은 콩마저 범버꾸 범버꾸 하다 보니 씹을 수도 씹히지도 않았다. 그래도 아이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고 꼬챙이로 장단을 맞추듯 땅을 치면서 범버꾸를 하는 것이 재미있었다.('요람기' 중)
한국 소설사의 명장면 중의 하나가 아닐까. 이 글을 읽는 순간 콩서리를 하며 '범버꾸 범버꾸' 소리내며 먹는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선해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이란 영화감독 아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상만 칭송할 것인가. 사건의 극적인 전개나 갈등 없이도 이렇게 생기 가득한 인물들을 그려낼 수 있는 것은 일찍이 오영수 단편이 일군 성과이다. 또 이는 한국인들의 정서에 내면화된 미적 경험이기도 하다.
고려대 박헌호 교수는 '한국인의 애독작품'(책세상문고)에서 한국인의 애독작품의 공통분모를 '향토적 서정소설'이라 설명한 적이 있다. 현대의 독자들이 이청준의 하고많은 소설을 제쳐 두고 '서편제'를 찾는 것, 황석영의 '삼포가는 길'을 유독 기억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라는 것이다. '요람기'를 읽다보면 향토적 서정이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도회인의 원형적 미의식의 현재진행형임을 확인케 된다. 탈이데올로기적으로 보이는 순수 속에 소시민적 정취를 따스하게 녹여내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들일에 바쁜 아버지 어머니보다, 무명 길삼 매만지기에 여념이 없는 그의 할머니보다 소년은 그의 누야를 따랐다. 소년이 언젠가 감기를 앓았을 때 코가 막혔다고 해서 입으로 코를 빨아낸 것도 그의 누야였다. … 누야의 치마폭에서는 언제나 콩누룽지 같은 구수한 냄새가 풍겼다. 소년은 할머니 입에서 풍기는 쿠릿한 냄새를 생각하고 누야가 더 가엾었다."('누나별'중) '누나별'에서 보듯, 근대화의 과정 속 뿔뿔이 흩어지는 형제들 사이의 애틋한 그리움은 가족에서 이웃 간으로 확대된다. '남이와 엿장수' '후조'까지 이 단편집의 책장을 덮고 나면 고무신과 엿장수, 구두닦이의 애환과 함께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하면서 콧날이 시큰해진다. 아이들에게 책 한 권을 통해 개구쟁이 시절('요람기')로 시작해서 형제애('누나별'), 남녀 간의 순수한 사랑('남이와 엿장수'), 그리고 밑바닥 인생을 지탱해주는 사람과 사람 간의 우정('후조')을 두루 경험케 할 만하다.
<< 오영수의 대표작 4편을 묶은 명작동화책 >> [한겨레신문 / 편집부]
’갯마을’ ‘메아리’ ‘화산댁’ 등 150여편의 주옥같은 단편을 남긴 오영수의 대표작 4편을 묶은 명작동화책이다. 나무(집성목)에 아크릴로 그린 화가 김용선의 수채화풍의 그림이 글과 매끄럽게 조화를 이루며 자연의 서정성을 한층 높이고 있다. 아이와 함께 읽으며 한국의 서정성과 향토성, 소박함의 향수를 전달하고 싶은 욕구를 자아낸다.
시골에서 올라와 식모살이를 하는 남이와 엿장수의 순박한 사랑을 그리고 있는 ‘남이와 엿장수’는 아이들에게는 잔잔한 웃음을, 어른들에게는 짙은 연민을 동시에 자아낸다. 아이들이 엿과 바꿔먹은 남이의 옥색 고무신을 둘러싸고 말로 실랑이를 벌이는 엿장수와 남이의 사랑 싸움은 지금은 찾아보기 어려운 ‘고전’이나 마찬가지이다.
‘요람기’에서는 “높새가 불기 시작하면 기를 쓰고 연을 날리던”, 기차도 전기도 없고 라디오나 영화도 모르던 어린시절의 체험을 계절의 변화에 따라 잔잔하게 전하고 있다. 아이들이 우리나라의 사계절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게 한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의 서정적 분위기라고 생각하면 된다.
<< 오영수의 대표작이자 이 책의 표제작인 <요람기>의 시작 부분이다. >>
<요람기>는 이처럼 우리 기억 속에 잊혀져가는 1960년대 어느 산골 소년의 천진난만한 생활과 추억을 사계절의 변화에 따라 아주 소박하게 그려간다.탄탄한 이야기구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단편소설의 특징인 상징이 숨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요람기>는 오영수의 대표 단편소설로 손꼽히고 있다. 그것은 바로 오영수 소설에서만 맛볼 수 있는 '한국적 서정성'과 '인간미', '향토성'과 '소박함'이 고스란히 다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요람기>뿐만 아니라 오영수의 작품은 소시민적인 따뜻한 정감이 살아 있고, 각박하고 생기 없는 현실 속에 온화한 인정의 입김을 불어넣어서 소시민들의 애환과 인생을 그려냈다. 또한 대부분 읽기 쉬운 맑고 간결한 문체를 사용해 글 자체에서도 그의 소박하고 따뜻한 감성을 읽을 수 있다.<요람기>는 계절의 변화에 따라 이야기를 평면적으로 구성했다.
사건의 극적인 전개나 인물간의 갈등 없이, 어린 시절의 체험들을 잔잔하게 전하고 있다. 사계절의 변화는 이 작품의 내용과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중요한 배경이 되고 있다. 나무(집성목)에 아크릴로 부드러운 수채화풍의 그림을 그려'자연의 서정성'을 그대로 옮겨놓은 화가 김용선의 그림은 아주 자연스럽게 오영수의 글과 조화를 이뤄냈다.
봄철에는 들불놀이, 너구리 잡기를 하고, 여름에는 밤밭골에서 소에게 풀을 뜯기기도 한다. 멱을 감다가 참외 서리를 하고, 밤에는 평상에 누워 누이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들었다.가을이면 아이들과 콩 서리를 해서 '범버꾸- 범버꾸-' 소리 내며 먹었다. 그리고 겨울이 되면 연날리기를 즐겼다.아름다운 우리 시골의 사계에 담긴 천진난만한 동심의 세계는 지금의 어린 독자들에게는 느끼기 힘든 향토적 서정성을 전해주며, 그 시대를 살았던 그들의 부모들에게는 아늑한 어린 시절을 회상하게 하는 즐거움을 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