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4,000년에 걸친 <말하는 넙치>와 여자 요리사 이야기.
신석기 시대부터 철기 시대, 중세, 바로크 시대, 절대 왕정기, 혁명의 19세기와 20세기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기나긴 역사의 흐름을 움직여온 넙치와 열한 명의 여자 요리사들이 엮어낸 또 하나의 역사, 남자와 여자, 그리고 사회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작품.
귄터 그라스
1927년 10월 16일 폴란드의자유시 단치히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2차 대전중에 청소년기를 보낸 작가는 히틀러 청소년단에 가입했고, 1944-1946년 공군보조병, 전차병 등으로 참전했다가 미군에 의해 전쟁 포로로 수감되기도 했다. 이후 뒤셀도르프 예술대에서 수학하였고 전후 청년 문학의 대표적 집단인 <47그룹>에 가입했다. 1958년 처녀작인 <양철북> 초고를 <47그룹> 모임에서 낭독하여 그해 47그룹 문학상, 이듬해 뷔히너 상, 폰타네, 테오도르 호이스 상 등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했다. 1960년에는 독일 사민당에 입당하여 빌리 브란트를 위해 선거 운동을 벌이는 등 정치 활동을 하였고, <고양이와 쥐> <개들의 시절>을 발표하였다. 이로써 <양철북>의 맥을 잇는 <단치히 3부작>을 완성하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를 거치면서 미국, 이스라엘 등지에서 작품 낭독을 해왔고 1976년에는 하버드대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장편 <넙치> <텔그테에서의 만남> <암쥐> <무당개구리 울음>등과 같은 대작을 발표하였다. 1995년에는 독일 통일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작품 <아득한 평원>을 출간하여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1999년에는 그의 전 생애를 갈무리하는 장편 <나의 세기>를 발표하였다. 같은 해 스웨덴 한림원은 그라스를 20세기의 마지막 수상 작가로 선정하였다. 2002년 지난 57년간 금기시되어온 독일인의 참사를 다룬 문제작 <게걸음으로 가다>를 발표하였다. <넙치>는 발표된 뒤 2년 동안 45만부가 팔린 베스트셀러로, 1978년 5월 그라스는 그 수익금의 일부로 알프레드 되블린 문학상을 제정하였다.
1. 첫째 달
2. 둘째 달
3. 셋째 달
4. 넷째 달
넙치는 어떻게 두 번씩이나 잡혔나
신석기 시대의 어느 날, 넙치가 나의 어살 속으로 들어왔다는 이야기는 이미 앞에서 한 바 있다. 당시는 문제가 될 수 있는 모든 일을 여자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하던 때였다. 넙치와 내가 맺은 계약에 대해서는 이미 말한 바 있다. 나는 그를 놓아주었고, 그는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넙치다운 충고로 나를 인도해 주었다. 나를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를 거쳐 안내했으며, 초기 기독교 시대, 전성기 고딕 시대, 종교개혁 시대, 바로크 시대, 그리고 계몽 절대주의 시대와 사회주의 또는 자본주의 시대까지 두루두루 거치면서, 넙치느 모든 새대적 변동과 유행의 변화, 모든 혁명과 그 재발, 그리고 가장 최신의 진리와 진보를 누구보다도 앞서서 예견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우리 남자들이 모든 일을 미리 앞서서 대비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마침내 우리가 주도권을 손에 쥐게 되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런데 이제 그는 더 이상 나와 이야기하려 들지 않는다. <넙치님, 넙치님>하며 내가 거듭해서 간절히 불러도 <왜 그러는가, 젊은 친구?>하는 친근한 대답 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여자들이 긴 테이블에 모여 앉아 넙치를 심판하고 있다. 넙치는 이미 조금씩 자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 또한 왜 넙치가 얼마 전부터 나와 남자들이 하는 일에 싫증을 느꼈는지에 대해서 자백하련다.)
그러니까 석유 파동이 일어나기 몇 달 전의 일이었다. 나는 바다에 나가 넙치를 불렀다. (그때 나는 소득세 문제에 대한 조언을 받아볼 요량이었다.) 그러자 그는 선뜻 우리가 맺은 계약을 파기하겠다고 말했다. <너의 남자란 녀석들한테서는 이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어. 너희들은 계략과 음모만 일삼을 뿐이야. 이제부터는> 그는 결별을 선언하듯 말했다. <일제빌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힘을 써봐야 겠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