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자료, 파천황적인 테마, 위대한 모럴리스트인 저자의 정신과 사상에 의하여 만들어진 이 책은 인류의 지적 자산으로 평가되고 있다. 저자 자신은 이 <풍속의 역사>에 의하여 그의 문명사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이 책은 그 어떠한 역사서보다도 참으로 "살아 있는"역사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870-1940. 독일의 풍속사 연구가, 문명사가, 미술수집가.
1870년에 태어난 푹스는 슈트르가르트의 한 인쇄업소에서 경리직원으로 일하다가 1887년경에 사회민주당의 바이에른 지방 기관지 <뮌헨 포스트>의 기자로 발탁되어 뮌헨에 간다. 푹스는 그곳에서 리하르트 칼버와 일하면서 <뮌헨 포스트>의 풍자잡지 <남부 독일 포스틸론> 간행에 임시지원 형식으로 참여한다. 우연히 푹스가 <포스틸론>의 한 호를 맡아 편집한 것이 6만 부라는 이례적인 성공을 거두어 이후 그는 정치적 풍자를 전문으로 하는 잡지의 편집인이 되었고 이와 병행하여 군소 삽화가들의 흔적을 꾸준히 연구하는 사가로 일련의 저서를 발표했는데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삽화가 곁들인 중세에서 현재까지의 풍속의 역사 전3권(1910-12), 에로틱 미술의 역사 전2권(1908-10), 유럽민족의 캐리커처 전2권(1901-1903), 오노레 도미에, 목판화와 석판화 전4권(1918-22), 화가 도미에(1925), 에로틱의 대가들, 예술에서의 창조적인 것의 문제에 대하여, 회화와 조각(1931), 이밖에도 푹스는 당나라 시대의 조형과 예술, 여자 유대인 및 세계대전을 주제로 한 캐리커처도 특집으로 엮어냈다.
[1] 르네상스의 육체미의 이상
1. 르네상스의 육체미의 이상
2. 육체미의 예찬
3. 나체의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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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연애와 결혼
1. 연애의 본질
2. 개인적 성애의 발달
3. 연애에서의 동물적인 관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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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톨릭 교회의 도전
1. 르네상스 시대의 교회
2. 교회지배의 경제적 토대
3. 수도사와 수녀의 독신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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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유곽
1. 보호수단으로서의 매춘의 승인
2. 매춘의 범위
3. 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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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사교생활
1. 두레김쌈놀이방
2. 욕탕생활
3. 온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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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병든 관능
1. 마녀소동의 역사적 조건
2. 마녀박해의 에로틱한 토대
3. 악마의 잔치
연애와 결혼
"왕의 신격"이 언제나 음탕한 여자에 대해서 특히 결혼생활의 요구나 권리에 대해서 우선권을 쥔 것은 당연했다. 고귀한 열쇠의 소유자에게 어떤 귀부인을 애무하고 싶은 욕망이 울컥 치밀면, 설령 그 지위가 타인, 즉 남편이나 다른 정부에게 선점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선점자는 사랑의 전장에서 즉시 퇴각해야만 했다. 역사적으로 확인된 많은 실례는 다음의 사실을 증명해 준다. 자기 아내가 특별히 요염하고 아름답거나 혹은 다른 이유로 총애를 받고 있는 여관일 경우 그 남편은 1년에 몇 번이나 자기가 선점했던 침대에서 한밤중이더라도 퇴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것은 군주가 불시에 자기 아내에게 사랑놀음을 요구해온다든가 아내가 한밤 중에 국왕의 침대로 소환되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황당한가? 갑자기 직무정지를 명령받은 동침자의 퇴각이 어떤 이유 때문에 늦어지는 경우에 -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났던 것은 당연하다 - 미처 퇴각하지 못한 그는 방의 어딘가에 숨어서 특권적인 경쟁자의 사랑 사업과 그 성공을 두 눈을 뜬 채 그러나 몰래 우러러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많은 실례 가운데 하나의 예만을 들어둔다. 프랑스의 국왕 앙리 2세는 그의 공인 애첩이었던 푸아티에의 디안과 간통하던 뻔뻔스러움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국왕 앙리는 어느날 밤 디안의 방문을 두르렸다. 공교롭게도 그날 밤 디안의 방에는 브리사크 원수가 머물고 있었다. 예기치 않았던 일에 원수는 너무 당황하여 침대 밑으로 기어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국왕은 방으로 들어와서 아름다운 애첩 곁에 누워 브리사크가 숨어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랑하는 첩과 애무를 즐겼다. 몇 분 동안 디안과 즐긴 뒤에 국왕은 무언가 먹을 것을 요구했다. 이에 디안은 설탕에 절인 과일을 가득 채운 접시를 국왕에게 바쳤다. 앙리는 그것을 으적으적 씹어먹으면서 갑자기 한 조각을 침대 밑에 던져넣으며 "어이! 브리사크! 사람은 먹어야 사는 거야!"하고 소리쳤다. 이런 불유쾌한 일은 남자들이 궁정관리라는 직업에 종사하는 한, 푸념 한마디 하지 않고 당연히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고, 실제로 그런 불평은 한마디도 드러내지 않았다.
자기 아내가 군주라는 친구를 동경하여 "상사병"을 앓아도 귀족들은 불평 한마디 흘리지 않았다. 따라서 상사병은 간접적으로 그들에게도 분배되었다. 이런 것도 궁중에서의 입신출세라는 상거래에서는 흔히 있었던 어쩔 수 없는 잡비의 지출에 속하는 것이었다. 소발은 프랑수아 1세가 평생동안 성병으로 고민했고 그 때문에 궁정 전체도 끊임없이 성병으로 고민했으며 왕이 가끔 왕비의 침대에도 행차했기 때문에 왕비도 예외는 아니었다고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