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다리를 놓고 대작을 그리는 것이 꿈인 김점선에게 오십견이 왔다기에 당분간은 그림을 못 그리려니 했다. 그러나 웬걸, 그 여자는 컴퓨터를 이용해 수백 점의 그림을 그렸고 거기다가 그 여자 특유의 막강한 입심까지 곁들여서 한 권의 책으로 내놓으려 하고 있다. 신기한 일이다. 제한된 화면에 손끝으로 그린 그림이라고 믿어지지 않게 그 여자의 참을 수 없는 광기가 좁은 화면에 갇히기를 거부하듯 마음껏 분출하고 있으니.. 김점선 <10cm 예술>.
김점선
화가. 1946년 개성에서 태어났다. 1972년 홍익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했다. 그 해 여름 우리나라에서 처음 앙데팡당 전이 열렸다. 심사위원은 백남준, 이우환 선생이었다. 제8회 파리 피엔날레 참가자를 뽑기 위한 공모전이었는데, 주제는 극사실주의와 관념 예술이었다. 관념 예술에 속하는 작품을 출품했고, 뽑혔다. 화려하게 화단에 등단한 것이다. 그러나 곧 관념 미술에 염증을 느꼈다. 그는 미련없이 그 찬란한 무대에서 내려와 버렸다.
그후 그는 붓을 들고 그림을 그렸다. 아주 전통적인 그림들...원시시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형상이 있는 그림들...그는 빨간색 물감으로 도롱뇽을 그리고 말을 그렸다. 그림 속에 글씨도 썼다. 흑색과 백색이 지배하고 있던 당시 한국 화단에 그의 그림은 엄청난 반항을 불러일으켰다. 혹독한 비평과 찬사가 동시에 쏟아졌다. 그는 한때 선교사 통역일을 했다. 월급을 달러로 받았다. 그는 한때 영화도 만들었다. 세 번의 발표회도 가졌다. 1975년 홍익대 졸업식에서는 식장 안으로 관을 들고 들어간 행위예술<홍씨 상가>을 하기도 했다. 그는 지금도 그림을 그리는 노동자의 삶을 살고 있다. 그는 영감이라는 말을 거부한다. 영감을 신기루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영감을 예술가의 영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다르게 생각한다. 화가는 영감을 얻은 후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작업 과정에서 영감을 얻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일 년에 360일 동안 그림을 그린다. 그가 생각하는 화가는 예술가가 아닌 육체 노동자다. 1983년에 첫 전시회를 가진 후 20년 동안 한 해도 개인전을 거른 적이 없다. 거르기는커녕 두 세번 전시회를 여는 때도 있다. 30회에 이르는 그의 전시회는 모두 초대전이었다. 1998년 산문집 <나, 김점선>을 출간했다.
1. 만세를 부르자
2. 말 위에서 죽다
3. 나 자신 무당굿하다
4. 나 자신 성의 혼돈
5. 나 자신 첫사랑
6. 나팔꽃
7. 그 자신 성장
8. 그 자신 청춘
9. 그 자신 이상한 연애
10. 새를 안고 가는 사람
11. 물고기를 안고 가는 사람
12. 우주 말
13. 우주 새
14. 우주 토끼
15. 토끼
...
허무한 세상
열 살 무렵 우리 형제들을 앉혀 놓고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옛날에 아주 친한 두 사람이 이웃에 살았다. 밤중에 한 친구가 자루에 뭔가를 담아 메고 찾아왔다.
"여보게. 내가 실수로 사람을 죽였네. 아무래도 자네 집 마루 밑에 이것을 파묻어야 되겠네."
"그러세."
둘이서 마루 밑을 파고 그 자루를 묻었다. 다음날 아침에 그 친구가 찾아왔다.
"자넨 나의 친구일세. 우리가 파묻은 건 사람이 아니고 돼지일세."
그들은 돼지를 꺼내어 잔치를 벌였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났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지 감동했다. 그러면서 열살 먹은 나는 속으로 맹세했다. 내 친구가 어떤 나쁜 짓을 하자고 해도 같이 하기로, 목숨 걸기로, 그때 맹세했다. 나는 아버지의 말을 친구를 위해서는 살인조차도 동조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평생을 통해서 그 맹세를 실천하려고 애썼다. 실천1. 내 친구가 유부남과 바람이 났다. 그 친구가 본처를 죽이는 굿을 하러 가자는데 말리지 않고 따라갔다.
실천 2. 과락에 걸려 졸업하지 못하게 된 친구들의 대리 시험을 학교나 성별, 과먹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쳤다.
실천 3. 누군가가 내게 명령만 내리면 무엇이든지 훔쳤다. 커피숍에서는 재떨이와 찻잔 받침, 시장에서는 귤이나 커피를 훔쳤다. 일 년쯤 지난 뒤에 목사나 신부. 스님이 아닌 우리 엄마에게 고해 성사를 했다.
<< 말(馬)그림' 화가의 '천방지축 인생담 >> [문화일보 / 배문성기자]
화가 김점선씨의 두번째 산문집 『10cm예술』이 주는 가장 큰 즐거움은 ‘전혀 새롭게 사는 방식’이 있다는 걸 확인하는 것이다. 자신의 결혼과정, 그림을 그리는 방식,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 등을 담은 다분히 자전적인 산문을 읽고 있으면 저절로 “아 이렇게 살아도 하나의 삶이 만들어질 수 있구나”싶다.
정말 특별하고 놀라운 삶이다. 물론 그 글 너머에 어떤 상투성이, 어떤 일상의 삶이 감춰져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찌됐든 글만 봐서는 ‘삶의 또다른 방식’을 말하기에 충분하다. 이를테면 사람을 만나는 방식, 결혼하는 방식, 일하는 태도에서도 ‘김점선의 형식’이 있다. 세상에는 만가지 삶이 있다는 것을 책은 명확하게 보여준다.
책은 ‘말(馬)그림’으로 유명한 화가의 자전적 산문과 그의 컴퓨터 그림으로 꾸며져 있다. 화가는 최근 오십견이 생겨서 붓을 들지 못한다고 한다. 그가 여행하는 방식은 이렇다. 몇번 여행을 하지 않은 화가는 그나마 여행을 가면 돌아가는 차비만 빼고 있는 돈을 전부 민박집에 줘 버린단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이거면 얼마 동안 묵을 수 있을까요.” “다섯달.” 그러면 다섯달 동안 거기서 머문다.
다섯달 동안 이불 한번 안 개고, 방에 불 한번 안 넣고, 물론 청소 한번 안 하고…. 극한까지 자신을 밀어붙이는 것이다. 무엇을 해도 끝까지 가봐야 다음으로 넘어가는 삶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야 화가는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고 자랑한다. 그 아름다움이 뭘까. 청소 한번 안 하고 다섯달을 뭉갠 민박집 방에 뽀얗게 쌓인 먼지융단. 이것을 만나기 위해 다섯달이 필요했다.
결혼과정을 담은 글도 요절복통이다. 그러나 결혼조차 화가의 길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고 걸어가는 태도에는 묘한 슬픔이 배어있다. 여하튼 이렇게 결혼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이혼당한 거물급 화가의 화실에 빌붙어 사는 이혼당한 한 사내가 있었다. 어느날 형님(거물급 화가)은 사내에게 지령을 내렸다. 지령은 ‘헝클어진 머리(김점선)’와 잠 자는 데 성공하는 자에게 부두목 자리를 주겠다는 것.
화실에서 술자리가 열린 날, 형님은 사내에게 노래를 하라고 지시했다. 사내는 미친듯이 열광적으로 노래를 불렀다. 노래 한 소절이 끝나자마자 ‘헝클어진 머리’가 갑자기 소리쳤다. “우리 결혼하자.” 사내가 말했다. “좋다. 하자.” 그날밤 ‘헝클어진 머리’와 사내는 근처 여관으로 갔다. 5분도 안돼 사내가 뛰어나와 두팔을 높이 들고 펄쩍펄쩍 뛰면서 이렇게 외쳤다. “형님의 지령을 완수했다.” 화가는 그렇게 결혼했다.
책은 얼추 세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범상치 않은 운명을 기꺼이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고 끝까지 질주하는 화가의 정체성을 담은 ‘나 자신’이란 부분은 처절하다. 성장·청춘·결혼 등의 과정을 담은 ’그 자신’이란 부분은 웃기지만 서글프다. 나머지는 말·나무·고양이·꽃 등을 화폭에 담는 화가가 대상에 대한 독특한 기호를 담은 에세이다.
<< 사방 10cm 태블릿Tablet에 펜으로 그려낸 세상, 그 무한한 예술 세계 >>
컴퓨터가 나타나고 그래픽 프로그램들이 발전하면서 컴퓨터로 그리는 그림, 이른바 디지털 미술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디지털 미술이라고 불리는 이 컴퓨터 미술들은 질적으로 원화가 가지는 아우라나 예술적 진정성을 확보하기는 힘들었다. 서양화가 김점선의 그림은 이런 점에서 기존의 디지털 미술과 분명하게 구별된다.
사다리를 놓고 대작을 그리는 것이 꿈인 김점선에게 어느 날 오십견이 왔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오른쪽 어깨의 통증 때문에 도저히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화가에게 손을 쓸 수 없다는 것은, 또한 그런 이유로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것은 육체적 고통보다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심적 고통에 가깝다.
이런 위기와 고통의 순간에 김점선이 만난 것이 컴퓨터. 처음엔 글이라도 쓰려고 시작했지만, 어느새 포토샵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손바닥만한 그림판, 태블릿을 사용해, 그녀가 화폭에 담았던 그림만큼 예술성 있는 그림들을 예전보다 더 쉽게 더 많이 그릴 수 있게 됐다.
이 그림들은 팔로 그림을 못 그려서 컴퓨터로 그려졌고, 굉장히 개인적이다. 누군가에게 보여준다기보다는 컴퓨터라는 매체를 통해서 내 자신에게로 몰입해가는 성실하고 진솔한 하나의 과정이다. 이 과정들이 과연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궁금하다. -'글머리에'에서
작가의 말처럼 이 그림들은 팔로 그림을 못 그려서 그리게 된 그림들이지만,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로 몰입해가는 성실하고 진솔한 하나의 과정이 되었다. 화가의 입장에서 컴퓨터로 그리는 그림의 장점은"물감과 화폭을 무한정 쓸 수 있고 그림 백 개를 그려서 쌓아놔도 짐이 되지 않는 데다, 어딘가로 옮겨도 무겁지 않고 곰팡이도 슬지 않는다"는 편리함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한 가지 주제를 여러 각도로 탐구하듯 아주 깊이, 아주 많이 그릴 수 있다는 것이 디지털 미술의 가장 큰 매력이다. 그녀의 말대로 이 그림들은 그녀에게'사람이 언어를 떠나서 시각만으로도 사고할 수 있을까'에 대한 탐구에 다름 아니다.『10cm 예술』에는 김점선이 그린 200여 점의 그림 중에서 마음산책에서 고른 64점의 그림과 57편의 신작 산문이 실려 있다.
<< 글에 담아낸 화가 김점선의 예술과 인생 >>
자신의 삶에 대한 단상에서 예술론에 이르기까지 이 책은 김점선의 그림을 이해하게 하는 단서와 길잡이다. 그녀의 글은 마치 자유롭고 거침없는 그녀의 천성과 같이, 돌려 말하지 않고 삶과 예술의 핵심을 직설적으로 풀어낸다. 책 속의 글 제목은 그림의 제목과 같다. 글은 그녀의 그림을 직접 보여주는 창이기도 하고, 또한 세상을 바라보는 한 예술가의 잘 삭은 인생론이기도 하다.
1부 유년의 기억에서부터 결혼 후 죽을 고비를 넘기며 그림을 그렸던 결혼 생활까지, 그녀의 삶을 투영하는 그림들을 밑바닥에서부터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글들을 모았다.
2부 남편과의 만남, 결혼 그리고 사별까지의 아픈 추억과 남편에서 확장된 그들, 즉 사람에 대한 김점선의 생각을 담았다. 남편과 사별한 뒤 새벽마다 새벽길을 걸어 성당에 도착해보면, 늘 먼저 온 사람이 한두 명씩은 있게 마련이었고 그때마다 김점선은'세상엔 나보다 불행한 사람들이 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남편을 위해 기도하고 돌아오는 길의 환한 나팔꽃 무리들은 그녀에게 슬픔 속에서 오히려 더 깊은 진실과 희망을 깨닫게 해주는 매개체였다.
3부 김점선의 그림 중 가장 주요한 모티프를 이루는 동물 소재의 그림과 글. 동물은 그녀에게 먼저 떠난 사람들이 잠시 다시 태어나 우리를 기다리는 존재이기도 하며(게사니, 학)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을 반성하게 하는 대상이기도 하다(토끼, 염소). 동물은 또한 때로는 우리를 넉넉히 품어주는 따뜻하고 커다란 존재이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 품에 안겨 있는 다른 세계의 측은한 존재이기도 하다(새를 안고 가는 사람, 물고기를 안고 가는 사람).
4부 역시 김점선 작품의 주요 모티프인 식물성 이미지의 그림과 글. 그에게 식물은 과거를 환기시키는 비자발적 기억의 매개물이기도 하고(붓꽃, 제비꽃, 히아신스, 백합) 자기 자신의 모습의 투영이기도 하다(맨드라미, 엉겅퀴). 마지막으로, 고정된 시각이 아니라 몇 겹의 자유롭고 폭넓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것을 화폭에 담는 화가의 예술론을 만날 수 있다(세 겹의 눈).
